맨위로가기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빌헬름 부르크도르프는 독일 국방군의 장교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육군 인사처 처장과 아돌프 히틀러의 수석 부관을 역임했으며, 에르빈 롬멜의 자살에 관여했다. 베를린 전투 중 히틀러의 벙커에서 최후를 함께 했으며, 1945년 5월 2일 한스 크레브스와 함께 자살했다. 영화 《몰락》에서 그의 역할을 묘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급 기사 프리드리히 훈장 수훈자 - 하인츠 구데리안
    하인츠 구데리안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기갑 부대를 지휘하며 전격전 전술을 발전시키고 전차 개발에 관여했으며, 전후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알렸으나 나치 정권과의 협력 등으로 논란이 있는 독일 군인이다.
  • 2급 기사 프리드리히 훈장 수훈자 - 에리히 회프너
    에리히 회프너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동부 전선 활동, 7.20 사건 연루 등을 거친 독일 군인이다.
  • 독일 국가방위군 관련자 -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은 제1,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기갑 부대를 지휘했으며, 아르데아티네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전쟁 범죄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후 석방되었다.
  • 독일 국가방위군 관련자 - 한스 크렙스 (1898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한스 크렙스는 동부 전선에서 활동하며 베를린 전투에서 퓌러 벙커를 지휘하다 히틀러 자살 후 소련과의 강화 교섭 실패 후 자살했다.
  • 독일 국방군 보병대장 - 디트리히 폰 콜티츠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제1,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장군으로, 히틀러의 파리 파괴 명령을 거부하고 연합군에 항복하여 "파리의 구원자"로 불리며, 전쟁 후 유대인 학살 연루 의혹을 받았으나 구체적인 혐의는 없었고 그의 파리 파괴 거부는 도덕적 선택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지만 동기에 대한 논란도 있다.
  • 독일 국방군 보병대장 - 한스 크렙스 (1898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한스 크렙스는 동부 전선에서 활동하며 베를린 전투에서 퓌러 벙커를 지휘하다 히틀러 자살 후 소련과의 강화 교섭 실패 후 자살했다.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빌헬름 에마누엘 부르크도르프 (1944년)
이름빌헬름 에마누엘 부르크도르프
출생일1895년 2월 15일
사망일1945년 5월 2일
사망 원인총기 자살
출생지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주 퓌르스텐발데
사망지독일 베를린
소속
충성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군 종류독일 제국 육군
프로이센 육군
바이마르 공화국군
독일 국방군 육군
복무 기간1914년 - 1945년
최종 계급보병대장
지휘육군인사청
제529보병연대
부대제12척탄병연대 (제1차 세계 대전)
제529보병연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바르바로사 작전
베를린 전투
주요 훈장제1차 세계 대전
철십자 훈장
철십자 훈장 2급
철십자 훈장 1급
제2차 세계 대전
기사 철십자 훈장
동부 전선 종군 메달
주요 보직
육군인사청장임기 시작: 1944년 10월 12일
임기 종료: 1945년 5월 2일
전임루돌프 슈문트
후임폐지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부관임기 시작: 1944년 10월 12일
임기 종료: 1945년 4월 30일
국가나치 독일

2. 초기 생애 및 교육

부르크도르프는 1895년 2월 15일,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퓌르스텐발데에서 태어났다.

3. 군 경력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부르크도르프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프로이센 육군에 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하여 1915년 제12 척탄병 연대 소속 보병 장교로 임관했다. 전쟁 후에는 국방군에서 복무했으며 1930년 대위로 진급했다.

1935년 소령 계급으로 드레스덴의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술 강사로 활동했으며, 1937년에는 제9 군단 참모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38년 중령으로 진급했고, 1940년 5월부터 1942년 4월까지 제529 보병 연대장을 역임했다.

1942년 5월, 육군 인사처 제2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하며 부처장 자리에 올랐다.

1944년 10월, 루돌프 슈문트의 후임으로 육군 인사처 처장 및 아돌프 히틀러의 수석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와 동시에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한 달 뒤인 1944년 11월 1일에는 보병 대장 계급으로 진급했다. 부르크도르프는 사망할 때까지 이 계급과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모든 국방군 장교와 판사가 독일의 최종 승리에 대한 회의론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 지도부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을 하는 장교는 국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다"고 포고했다.[1]

3. 1.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5월부터 1942년 4월까지 제529보병 연대장을 역임하며 독소전에 참전했고, 기사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4월에 독일 육군 인사국 제2부장에 임명되었고, 10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인사국 차장이 되었다.

부르크도르프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7·20 사건 이후 에른스트 마이젤과 함께 사건 연루 의혹을 받던 에르빈 롬멜 원수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역할을 맡았다. 롬멜은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자살에 동의했고, 부르크도르프 등이 건넨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 빌헬름 카이텔 원수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롬멜을 인민법정에 세워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는 것이 국민 사기 저하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히틀러 정권의 조치였다.

1944년 10월, 7·20 사건 당시 입은 부상으로 루돌프 슈문트가 사망하자, 부르크도르프는 그의 후임으로 육군 인사국장과 총통 부관의 부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3. 2. 롬멜의 죽음에 대한 역할

부르크도르프는 나치 독일원수였던 에르빈 롬멜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롬멜은 아돌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인 7·20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군 중 한 명이었던 롬멜을 공개적인 재판인 인민 법정에 세울 경우 국민적 동요가 클 것을 우려한 히틀러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1944년 10월 14일, 부르크도르프는 에른스트 마이젤 장군과 함께 롬멜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는 롬멜에게 연루 혐의를 공식적으로 알리고,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 빌헬름 카이텔 원수의 지시에 따라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2] 첫째는 히틀러에게 직접 가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 둘째는 혐의를 인정하고 독약을 마시는 대신 국장으로 예우받고 가족과 부하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 셋째는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는 것이었다.[3]

롬멜은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는 두 번째 선택지를 택했다. 그는 아내와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부르크도르프와 마이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약 10분 후, 롬멜의 가족은 그가 자살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전화로 통보받았다. 훗날 카이텔 원수는 국민적 영웅인 롬멜이 재판정에 서는 모습이 대중에게 미칠 부정적 파장을 막기 위해 이러한 조치가 내려졌다고 증언했다.

부르크도르프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7·20 사건에서는 에른스트 마이젤과 함께 용의자로 의심받던 에르빈 롬멜 원수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사자로 파견되었다. 1944년 10월, 7·20 사건에서의 부상이 원인이 되어 루돌프 슈문트가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독일 육군 인사국 국장과 총통 부관의 부관장에 임명되었으며, 11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3. 3. 베를린 전투

베를린 전투 직전, 필리프 프라이헤르 폰 뵈젤라거는 부르크도르프가 "전쟁이 끝나면, 유대인 다음으로 육군 내 가톨릭 장교들을 숙청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뵈젤라거는 로마 가톨릭 신자이자 국방군 장교로서, 전투에서 보여준 자신의 용맹한 행동에 대한 훈장을 언급하며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부르크도르프가 대답하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공격했을 때 부르크도르프는 히틀러와 함께 ''총통 벙커''에 합류했다. 1945년 4월 24일 총통 벙커에서 열린 작전 회의에서 그는 히틀러에게 펠릭스 슈타이너의 진격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4월 28일,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가 백작 폴케 베르나도테를 통해 서방 연합국에 항복을 협상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에 격분한 히틀러는 힘러의 SS 연락 장교이자 에바 브라운의 처남인 헤르만 페겔라인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부르크도르프는 이 재판에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SS-장군 빌헬름 모른케가 재판을 주재했으며, SS-장군 요한 라텐후버와 장군 한스 크레브스가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페겔라인은 술에 너무 취해 울고 토하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고, 심지어 바닥에 소변을 보기까지 했다. 재판관들은 그가 재판을 받을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했고, 모른케는 재판을 종결하고 페겔라인을 라텐후버와 그의 경호대에 넘겼다. 이후 페겔라인은 페터 헤글에 의해 처형되었다.

1945년 4월 29일, 부르크도르프는 크레브스, 요제프 괴벨스, 마르틴 보어만과 함께 히틀러의 마지막 유언을 목격하고 서명했다. 히틀러가 자살한 1945년 4월 30일 이후, 괴벨스가 총리가 되었으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5월 1일, 괴벨스는 크레브스를 시켜 소련군 원수 바실리 추이코프에게 일시적 휴전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괴벨스가 더 이상의 협상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장군들을 비난하며 히틀러의 항복 금지 명령을 상기시키자, ''관방 차관'' 한스 프리체는 독단적으로 항복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근처 빌헬름플라츠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가서 소련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보낼 항복 편지를 썼다. 이 소식을 들은 부르크도르프는 프리체의 사무실로 쫓아가 그에게 베를린을 항복시킬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프리체가 그렇다고 답하자, 부르크도르프는 히틀러가 항복을 금지했고 민간인인 프리체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고 소리치며 PPK 권총을 꺼내 프리체를 쏘려 했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한 전파 기술자가 재빨리 총을 쳐서 총알은 천장에 박혔고, 몇몇 사람들이 부르크도르프를 사무실 밖으로 몰아내 벙커로 돌려보냈다.

1945년 5월 2일 새벽, 히틀러와 괴벨스가 자살한 후, 부르크도르프는 그의 동료이자 참모총장이었던 한스 크레브스와 함께 벙커 창고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소련군은 벙커 단지를 점령한 후 크레브스와 부르크도르프의 시신을 발견했다.

4. 성격 및 평가

융커 출신이 아니었으며, 마지막까지 히틀러나치즘에 충성을 다했고 스스로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지하 벙커에서 마지막 날들을 보내면서, 나치당 관방장관이었던 보어만에게 "젊은 장병들은 총통과 국가를 위해 죽은 건가? 아니, 당신들을 위해서다."라고 말하며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사리사욕을 채우는 나치 고위 간부들의 부패를 비판했다. 주벽(酒癖)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총통 지하벙커에서도 틈만 나면 술을 마시고 취해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5. 수상 내역


  • 철십자 훈장 (1914)
  • * 2급 (1915년 1월 24일)
  • * 1급 (1916년 8월 14일)
  • 칼이 있는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기사십자장 (1917년 8월 27일)
  • 군사 공로 십자 훈장, 전쟁 무공장식 3급 (오스트리아-헝가리, 1918년 2월 27일)
  • 칼이 있는 프리드리히 훈장 2급 기사십자장 (1918년 7월 18일)
  • 함부르크 한자 십자 훈장 (1918년 10월 18일)
  • 1914/1918년 세계 대전 명예 십자 훈장 (1934년 12월 20일)
  • 국방군 근속 훈장 2급 (1936년 10월 2일)
  • 철십자 훈장 부장 (1939)
  • * 2급 (1940년 6월 15일)
  • * 1급 (1940년 6월 17일)
  • 철십자 훈장 기사십자장 (1941년 9월 29일) - 당시 계급은 ''대령'', 제299 보병 사단 지휘관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2004년 독일 영화인 『몰락』에서 배우 유스투스 폰 도나니가 빌헬름 부르크도르프를 연기했다. 극중에서는 술에 취한 모습이 종종 묘사되었으며, 격분하는 히틀러에게 유일하게 당당하게 맞서는 등 격렬한 성격으로 그려졌다. 마르틴 보어만을 비판하는 장면도 촬영되었으나, 영화 본편에는 포함되지 않고 메이킹 영상에 수록되었다.

참조

[1] 간행물 Der Spiegel 1978
[2] 서적 Field Marshal: The Life and Death of Erwin Rommel https://books.google[...] Casemate 2015
[3] 문서 Manfred Rommel, Nuremberg testimony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